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지은이 : 류시화
출판사: 더숲

읽은기간 : 2020년 8월 10~19일

 

 

마지막까지 참 좋은 책이였다.

쉽고 자연스럽게

삶이 어떻하면 더 아름다울까에 대한 모습들을 천천히 알려주었다.

 

사람들마다 다들 각자의 목표가 있을 것이다.

요즘 열심히 사시는 분들 보면

새벽 5시에 기상하고 책을 읽고 그 것으로 유튜브도 하고, 블로그도 한다.

그들의 목표는 무엇일까

 

나도 한때 나의 목표를 새벽 5시 기상, 눈뜨자마자 요가로 몸풀기, 108배, 명상, 독서로 잡았다.

하지만 너무 많은 일정은 나를 지치게 했고 운동은 저녁으로 돌리고 아침엔 요가 정도로 정리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 목표를 잡는 행위의 이유는 뭘까?

내가 건강하기 위해서?

내 삶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서?

모두 열심히 사는데 이런것을 안하면 뒤처지는 거 같아서?

 

나는 2015년 퇴사 이후 나의 인생을 걷고 있다.

그렇게 믿고 있다.

그래서 모두 열심히 사는데 뒤처지는 거 같아서 이런 목표를 삼았다는 걸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돌아보니 나는 유튜브를 통해 

'와, 다른 사람들 이렇게 열심히 사는 구나, 나도 해야겠다' 로 시작했다.

운동과 독서등은 늘 인생의 숙제였으니 목표에 요리조리 집어 놓은 것이다.

그 결과가 실패했다고 나에게 실망을 하진 않았다.

하다가 못하면 그럴 이유가 있었고 그 이유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왜 그런 목표를 삼았느냐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난 나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그런 목표에 매몰되어 좋다고 시작을 한 이유가 궁금했다.

 

저자는 삶의 여정이 집으로 가는 것이라 말한다.

어떤 이상향이 삶의 목표인 듯 하지만 결국 집으로 가는 것이 삶의 여정이라고.

그리고 삶의 문제를 풀기 위해 시작한 여행은 여행지에 도착할때까지라고. 

어떤 여행지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결국 내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이 세상에

어디로 가기 위해 이런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책의 수많은 명언들 사이에서 가장 큰 울림을 주는 것은 마지막 챕터였다.

 

내가 명예를 원하거나, 돈을 원하는 삶을 살고자 하지 않는다면

나는 왜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며 오늘도 바쁜 호흡을 내뱉고 있는걸까?

집으로 가기 위해?

여기서 말하는 집이란 무엇일까?

 

정말 그 sweet home 이라면

나는 지금껏 사람을 그것으로만 보고

사람 사이의 삶의 여정을 즐기지 못하고 있는 걸까?

 

내가 사는 사람의 여정의 목표점.

그것이 이 책이 나에게 준 선물인 듯하다.

 

그리고 이 책 안에 숨겨진 수많은 명언들.

내가 채 이해하지 못한 것들도 많으리라.

1년 뒤 이 책을 다시 읽고 더 많은 걸 읽어 내길 바랄뿐이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지은이 : 김연수
출판사: 문학동네

읽은기간 :2020년 7월 27~28일

 

 상실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있다.
사랑에 대한 애착이나 정 같은 게 없은 나라서 상실..
사람에 대한 상실은 잘 이겨낼 거 같다’라거 생각하지만 진짜 소중한 이를 잃는다는 상상은 그 수가 적은만큼 아찔하다.

그런데 기억하는 한 삶의 가장 처음부터가 상실인 사람은 어떻하나
사춘기가 되면서 혹은 그 전부터
남과 다른 것을 인지하고 놀림당하고
그러다 나의 생의 진실에 맞닿게 되면
그 사람의 이후의 삶은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 걸까.

카멜라는 카밀라라서 카밀라라고.
카밀라의 양부는 이렇게 카밀라의 질문에 대답한다.
왜 나의 이름을 카밀라라고 지었느냐는 카밀라의 질문은 양모가 돌아가시고 양부까지 새로운 여자가 생기면서 완벽히 혼자가 된 그때 던진 질문이었다.

그리고 한국의 친모를 찾아나선다.

정지은은 카밀라의 친모다.
18살에 삶을 놓은 지은을 25살의 카밀라가 찾았다.
물론 ‘희재’라는 그의 본명과 함께
그리고 계속해서 지은의 삶의 진실을 파헤친다.

지은의 자살을 두고 희재의 생물학적 아빠에 대한 풍문이 진남에 가득했다.
지은의 친오빠의 아이라는 이야기
지은의 독일선생님의 아이라는 이야기
진실을 아는 것은, 찾아내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게다가 독일 선생님의 경우는 다른 가정을 꾸리고 그의 다른 이해관계에도 얽혀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나의 진실을 밝히는 그 과장에서
누군가는 그의 잘못도 아닌 것에 상처를 받고
또 누군가는 잘못의 몇 배를 평생 벌로 받고 산다.
본의 아니게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본의 아니게 다른 누군가에게 잊혀진 상처를 덧나게한다.
그래서 그저 진실을 찾는 불쌍한 이에게 화살이 돌아기기도 한다.
그런 모든 과정을 통해 희재는 동명이인의 누군가를 찾는다. 그것이 저자가 말하는 그 숨은 뜻이 맞겠지

지은이 죽은 이유도
지은이 남긴 사진과 몇 안되는 대화에서
어떻게 그의 심연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을까?

2020년 7월 9일
박원순 전 시장님이 돌아가셨다.
모든 진실은 묻혀버렸고
그로인해 그의 생전 지지자들과 피해자라 주장하는 이들 사이에는 의미없는 논쟁만 가열중이다.

지은이 죽지 않고 살았더라면
그의 날개라고 하던 딸, 희재와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지은이 죽고 난 뒤에도 자신의 이해와 삶을 위해
진실은 안데간데없고 얼룩덜룩 온갖 음해에 시달리듯
박원순 시장님의 진실도 죽음과 한께 덮혀졌다.
진실을 찾지 못하고 빈약한 증거에서 자신의 믿음으로 심판내려지고 있다.
안타까운 생명
무엇이 그들을 낙담시키고
무엇이 죽음의 두려움조차 눈을 감게 했을까
그 심연의 이야기는 얼마나 깊고 어둡고 서늘할까?
우리가 알수 없는 그 서늘한 심연이 죽음을 넘어섰다
“우리는 결코 서로에게 건너갈 수 없을 것이다”

 

제목 : 다시 보는 5만 년의 역사

저자 : 타밈 안사리

출판사 : 커넥팅

책 읽은 기간 : 2020년 7월 19일~7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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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보고 살아가고 있을까?

내가 가지고 있는 나만의 세계관이 있듯 지구에 백만명이 있다면 최소 백만개의 사고가 존재할 것이다.

나는 태어난 지 40년이 되었고

40년 동안 경험한 것들이 교육된, 학습된, 노출된 정보에 의해 내가 바라보는 세상의 세계관이 존재한다.

 

그러나 좀 까칠하게 이야기 하자면

섣불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가 자신이 원하는 세계관에 맞춘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즉, 현재 세계에는 어느 중간세계에서 섞였을지 모르는 수많은 정보로 가득차 있다.

많은 이들이 실체적 진실로 가기 위해 수많은 정보와 싸우고 있다.  

정보의 출처를 찾고, 그 정보가 맞다는 것들 증명하기 위해 근거를 수집한다.

하지만 누구는 같은 정보를 두고 어떤 조사도 없이 가치없는 이야기라고 폄하하기도 하고, 비아냥거린다.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 똑같은 정보가 그저 내가 믿는 사람들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맹신적 신념이 되기도 한다.

 

나는 인간이 이성적, 사회적 동물이라는 의견에 큰 불만이 없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불확실과 비이성이 더 큰 주류임을 더이상 부정할 수가 없다.

 

이 관점에서 이 책을 살펴보자.

타밈 안사리의 [다시보는 5만년의 역사]는 세상을 각 문명의 탄생부터 중간 세계의 역할 등을 소멸과 재탄생의 관점이 아닌 변화, 즉 환경과 도구의 섞물림의 개념으로 설명했다.

 

더구나 저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성장한 배경 덕택에 우리가 쉽게 접하지 못했던 페르시아 무슬림 이슬람에 대한 지리적 문화적 섞물림에 대한 세밀한 통찰을 주고 있다.

(책의 초기부터 이집트보다 다이나믹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개인적인 선호도도 언급한다.)

 

저자가 처음 언급한 언어는 이야기로 설명될 수 있다.

까마귀나 다른 동물들은 단어를 인식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인식하는 단어의 수준을 넘는 문맥을 연결하는 이야기를 하는 능력을 키움으로써

다른 공간과 시대에도 전달하고, 남길 수 있는 정보를 주는 역할을 수행했으며

그것이 인류의 생존과 발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그 역할은 강력하게도 또 일관성 있게 시공간을 초월하는 스마트폰의 지금의 시대까지 그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 언급하는 것은 지리적 환경이다.

4대 문명은 그 지리적 환경에 따라 종교적 서사와 인간의 삶에 대한 의식을 형성한다고 하였다.

안정된 곳에 위치한 이집트문명은 농사를 기반으로 삶을 안정적으로 영위하고 신전등을 건설하며 내세에 집중하였지만 메소포타미아에는 지리적으로 오픈되어있고 많은 부락이 존재하여 서로간의 칩입이 잦았으며 제국의 건설로 이어졌다.

인더스 문명은 강의 흐름이 일정치 않아 강의 모습이 생명을 지속했기에 인도에서 삶에 대한 무상론적 철학이 자리잡혔다. 중국 황하문명은 제방등의 건설등 규율에 맞는 삶을 통치의 룰로 삼으면서 유교적 생활이 자리잡혔다.

그리고 중간세계의 스텝유목민들의 성장과 이동은 인류의 문화와 도구등의 섞물림이 이뤄져 세상을 변화시켰다.

이들 중간세계의 유목민의 이동으로 인해 상업이 발달하고 화폐를 사용하며 금융의 발달로 이어졌으며 이윤에 대한 욕심으로 식민지 건설과 전쟁까지 이뤄내는 역사를 썼다.

 

마지막으로 언어와 지리적 환경의 결합은 각기 다른 신념을 형성하였다.

즉 종교적 의미에서 중국은 공자와 노자, 인도는 힌두교와 부처, 페르시아는 아리아인, 이집트의 내세삶에 대한 동경등이 신념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뒤섞물림으로 인하여 각각의 공동체의 종교적 변화와 이념을 확고히 하게 한다.

어떤 것이 더 옳으며 어떤 것이 더 훌륭하다고 논의하기에는 수많은 섞물림이 유기적으로 맞물리며 이뤄어진 것이다.

 

예를 들면 기독교가 번영하고 독자노선을 걷게 된 것은

유대인은 인간의 몸을 한 하나님의 신성모독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며

그리스 로마문화에선 신이 1명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 유대인은 유대인이 되기 위해서 유대인의 집안에서 태어나 율법을 따르고 할례를 받아야 하는 절차가 필요하지만

기독교는 믿기만 하면 바로 구원이라는 차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 차이가 지금의 기독교의 번성을 이끌었다.

 

인류의 역사는 이렇듯 언어, 지리적 환경, 신념이라는 세 가지 요소의 섞물림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어떠한 이성적 작용이 아닌 흘러가는 환경적 섞물림, 즉, 이동과정의 편의성에서의 발견에서 각자의 삶의 지혜가 섞물려서 현 시점까지의 발전이 이뤄졌다.

하지만 지금 현재 세상이 아주 긍정적으로 발전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역사에 가정이 없지만 '그때 그랬었다면' 이라는 가정은 있을수도 있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저 우리는 우리의 의도와 상관없이 이렇게 5만년의 역사속의 모든 상황을 모두 거쳤치고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작가가 표지에서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인류 5만 년 역사를 되돌아보다!라고 했을 때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할까?

 

지금이 과거와 가장 달라진 것은 무엇보다 환경과 단절된 삶 속에 있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우리 주변에서는 인간이 조성한 식물이 아닌 것은 보기 힘들고

인간이 기르는 동물이 아닌 것은 찾기 힘들다.

환경이 파괴되고 동식물은 멸종의 길을 걷고 있다.

인간 내부에서의 논쟁들이 아닌 전 지구적 우주적 관점에서 우리는 인류의 생존과 공존에 대한 인식이 더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한다.

저자는 지배서사가 존재하려면 일관성이 필요하다고 한다.

역사에서 다양한 패러다임의 변화가 있었고 변화의 끝에는 모순으로 인한 극명한 변모들이 지속되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대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새로운 이념과 신념은 무엇으로 정해져야 할까

세계공동체는 한번도 완벽하게 이뤄진 적이 없다는 저자의 말에 용기를 얻어

더 늦기전에 환경에 대한 미래의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가야 할 시점이 아닐까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만들어나가지 않으면 그런 세상은 찾아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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