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나를 읽고 있다. 

 

 

 배영옥

복사기에서 새어나온 불빛이 내 얼굴을 핥고 지나가고

시린 가슴을 흝고 뜨겁게 아랫도리를 스치면

똑같은 내용의 내가 쏟아져 나온다

숨겨져 있던 생각들이, 내 삶의 그림자가 가볍게 가볍게

프린트되고, 내 몸무게가, 내 발자국들이

납작하고 뚜렷하게 복사기 속에서 빠져나온다

수십 장으로 복제된 내 꿈과 상처의 빛깔들이

말라버린 사루비아처럼 바스락거린다

살아서 꿈틀거리는 어떤 삶도 다시 재생할 수 있으리

깊고 환한 상처의 복사기 앞을 지나치면

누군가 지금 나를 읽고 있는 소리

온몸이 뻐근하다

 

 

-199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오랜만에 읽어 본 시다.

오랜만에 읽어봐서 일까.

복사기에서 복제되듯 내가 누군가에게 읽혀진다는 말에

한번쯤 느껴봤던 나의 감정들이 잘 정리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좋은 시다.

 

하지만 이 시는 영남일보에 기재된 배영옥 시인의 추모글에서 처음 접하게 되었다.

추모글 을 쓴 배영옥 시인은 지난 6월 11일 배영옥 시인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남을 슬퍼하며

그녀의 시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그녀의 성공과 아픔에 나의 연락이 혹여나 불편할까 자제 했다던 박지영 시인의 말도 너무나 공감가고

이러한 배영옥 시인의 시를 보니

그녀 마음 한 곳에 자리잡은 쓸쓸함과 공허함 같은 것이 느껴져

마음이 아프다.

그녀가 마지막에 편안하길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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