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다시 보는 5만 년의 역사

저자 : 타밈 안사리

출판사 : 커넥팅

책 읽은 기간 : 2020년 7월 19일~7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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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보고 살아가고 있을까?

내가 가지고 있는 나만의 세계관이 있듯 지구에 백만명이 있다면 최소 백만개의 사고가 존재할 것이다.

나는 태어난 지 40년이 되었고

40년 동안 경험한 것들이 교육된, 학습된, 노출된 정보에 의해 내가 바라보는 세상의 세계관이 존재한다.

 

그러나 좀 까칠하게 이야기 하자면

섣불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가 자신이 원하는 세계관에 맞춘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즉, 현재 세계에는 어느 중간세계에서 섞였을지 모르는 수많은 정보로 가득차 있다.

많은 이들이 실체적 진실로 가기 위해 수많은 정보와 싸우고 있다.  

정보의 출처를 찾고, 그 정보가 맞다는 것들 증명하기 위해 근거를 수집한다.

하지만 누구는 같은 정보를 두고 어떤 조사도 없이 가치없는 이야기라고 폄하하기도 하고, 비아냥거린다.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 똑같은 정보가 그저 내가 믿는 사람들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맹신적 신념이 되기도 한다.

 

나는 인간이 이성적, 사회적 동물이라는 의견에 큰 불만이 없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불확실과 비이성이 더 큰 주류임을 더이상 부정할 수가 없다.

 

이 관점에서 이 책을 살펴보자.

타밈 안사리의 [다시보는 5만년의 역사]는 세상을 각 문명의 탄생부터 중간 세계의 역할 등을 소멸과 재탄생의 관점이 아닌 변화, 즉 환경과 도구의 섞물림의 개념으로 설명했다.

 

더구나 저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성장한 배경 덕택에 우리가 쉽게 접하지 못했던 페르시아 무슬림 이슬람에 대한 지리적 문화적 섞물림에 대한 세밀한 통찰을 주고 있다.

(책의 초기부터 이집트보다 다이나믹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개인적인 선호도도 언급한다.)

 

저자가 처음 언급한 언어는 이야기로 설명될 수 있다.

까마귀나 다른 동물들은 단어를 인식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인식하는 단어의 수준을 넘는 문맥을 연결하는 이야기를 하는 능력을 키움으로써

다른 공간과 시대에도 전달하고, 남길 수 있는 정보를 주는 역할을 수행했으며

그것이 인류의 생존과 발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그 역할은 강력하게도 또 일관성 있게 시공간을 초월하는 스마트폰의 지금의 시대까지 그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 언급하는 것은 지리적 환경이다.

4대 문명은 그 지리적 환경에 따라 종교적 서사와 인간의 삶에 대한 의식을 형성한다고 하였다.

안정된 곳에 위치한 이집트문명은 농사를 기반으로 삶을 안정적으로 영위하고 신전등을 건설하며 내세에 집중하였지만 메소포타미아에는 지리적으로 오픈되어있고 많은 부락이 존재하여 서로간의 칩입이 잦았으며 제국의 건설로 이어졌다.

인더스 문명은 강의 흐름이 일정치 않아 강의 모습이 생명을 지속했기에 인도에서 삶에 대한 무상론적 철학이 자리잡혔다. 중국 황하문명은 제방등의 건설등 규율에 맞는 삶을 통치의 룰로 삼으면서 유교적 생활이 자리잡혔다.

그리고 중간세계의 스텝유목민들의 성장과 이동은 인류의 문화와 도구등의 섞물림이 이뤄져 세상을 변화시켰다.

이들 중간세계의 유목민의 이동으로 인해 상업이 발달하고 화폐를 사용하며 금융의 발달로 이어졌으며 이윤에 대한 욕심으로 식민지 건설과 전쟁까지 이뤄내는 역사를 썼다.

 

마지막으로 언어와 지리적 환경의 결합은 각기 다른 신념을 형성하였다.

즉 종교적 의미에서 중국은 공자와 노자, 인도는 힌두교와 부처, 페르시아는 아리아인, 이집트의 내세삶에 대한 동경등이 신념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뒤섞물림으로 인하여 각각의 공동체의 종교적 변화와 이념을 확고히 하게 한다.

어떤 것이 더 옳으며 어떤 것이 더 훌륭하다고 논의하기에는 수많은 섞물림이 유기적으로 맞물리며 이뤄어진 것이다.

 

예를 들면 기독교가 번영하고 독자노선을 걷게 된 것은

유대인은 인간의 몸을 한 하나님의 신성모독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며

그리스 로마문화에선 신이 1명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 유대인은 유대인이 되기 위해서 유대인의 집안에서 태어나 율법을 따르고 할례를 받아야 하는 절차가 필요하지만

기독교는 믿기만 하면 바로 구원이라는 차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 차이가 지금의 기독교의 번성을 이끌었다.

 

인류의 역사는 이렇듯 언어, 지리적 환경, 신념이라는 세 가지 요소의 섞물림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어떠한 이성적 작용이 아닌 흘러가는 환경적 섞물림, 즉, 이동과정의 편의성에서의 발견에서 각자의 삶의 지혜가 섞물려서 현 시점까지의 발전이 이뤄졌다.

하지만 지금 현재 세상이 아주 긍정적으로 발전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역사에 가정이 없지만 '그때 그랬었다면' 이라는 가정은 있을수도 있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저 우리는 우리의 의도와 상관없이 이렇게 5만년의 역사속의 모든 상황을 모두 거쳤치고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작가가 표지에서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인류 5만 년 역사를 되돌아보다!라고 했을 때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할까?

 

지금이 과거와 가장 달라진 것은 무엇보다 환경과 단절된 삶 속에 있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우리 주변에서는 인간이 조성한 식물이 아닌 것은 보기 힘들고

인간이 기르는 동물이 아닌 것은 찾기 힘들다.

환경이 파괴되고 동식물은 멸종의 길을 걷고 있다.

인간 내부에서의 논쟁들이 아닌 전 지구적 우주적 관점에서 우리는 인류의 생존과 공존에 대한 인식이 더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한다.

저자는 지배서사가 존재하려면 일관성이 필요하다고 한다.

역사에서 다양한 패러다임의 변화가 있었고 변화의 끝에는 모순으로 인한 극명한 변모들이 지속되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대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새로운 이념과 신념은 무엇으로 정해져야 할까

세계공동체는 한번도 완벽하게 이뤄진 적이 없다는 저자의 말에 용기를 얻어

더 늦기전에 환경에 대한 미래의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가야 할 시점이 아닐까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만들어나가지 않으면 그런 세상은 찾아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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