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 


오랜만에 헤르만 헤세의 글을 읽었다. 

이 블로그에 접속한지도 3개월이라는 걸 알고선 그간 내 삶의 행적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잠시 위로가 필요했다. 


2018년 4분기. 

정말 오래만에 너무나도 힘든 시간 시간들을 겪었다. 

불안과 무력감. 쫓김과 쫓김.

해내야 한다는 강박과 그 강박에 어긋나는 일정들에 정신이 나가는 날들이었다. 

결국 공황이 다시 찾아왔고 

요즘은 내 심리와 내 전반적인 건강 상태에 대해 조금의 휴식을 주고 있는 타임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내가 초래한 일인만큼

지금도 제대로 된 휴식은 주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독서 모임에 참가했다. 

대구에 있는 독서모임. 

정말 간만에 책을 읽고 나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카페를 찾았다. 

이 안락한 시간이 나에게 다시 왔다는 것을 만끽했고

새롭게 만난 사람들이 나와 동류라는 안도감을 느끼는 기쁨도 느꼈다. 

마치 내 대학동창들 같다고나 할까. 


그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이 모임에서 이달의 책이 

바로 '싯다르타' 였다. 

 

그 책 이야기를 지금 해보고자 한다. 

어제, 그리고 오늘  완독했다. 

오랜만에 제대로 집중해 본 책이였다. 


책에서 싯다르타라는 주인공은  

우리가 알고 있는 고타마 싯다르타 즉 부처님은 아니다. 

책에서 진짜 나오는 부처님은 다만 고타마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신다. 

부처님의 고타마 싯다르타의 이름을 

세속의 구도자인 싯다르타와 이미 도를 이룬 부처님 고타마로 나눠놓았다. 


1부에서 다룬 싯다르타의 모습은 부처님이 도를 찾기 위해 떠난 유년기 같은 모습이였다. 

하지만 부처님의 유년시절보다 훨씬 더 정갈하고 모범적인 모습이라고 해도 좋을 거 같다. 

부처님은 세속에서의 모든 다양한 경험에서도 찾을 수 없는 진리를 찾기 위해 떠나셨지만 

싯다르타는 교과서적인 삶만을 살다 구도를 하였으며 모든 현실적 상황은 그 뒤에 겪게 되었다. 


싯다르타가 부처의 도를 깨닫는 과정을 좀 더 인간적으로 그렸다고 나는 느꼈다.

그것이 나의 삶과도 닮아 있으며 또 우리 모두와 닮아 있었다. 

마지막에 싯다르타가 고빈다에게 말해주는 그만의 교리는 이것이였다. 


모든 사람들에게서 사랑을 받으면서도 자신만은 기쁘지 않았던 싯다르타는 

처음 집을 나서 바라문이 될 때 자신의 마음에 있었던 교만함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교만함이 모든 사물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도 모두 배어 있음을 알아갔다. 

이제서야 싯다르타는 모든 사람 혹은 사물에 비천함은 없으며, 그 자체로 완전한 존재이며 그 무엇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더이상 사물과 사람에 대해 가치를 따지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기준에서 가치를 파악하고 그 물건에 대해 시비를 가리지 않고 그 자체로서 완전한 우주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고행하면서 구도를 하는 스승을 만나 누구보다 빨리 배우고 자아를 벗어나고자 햇던 싯다르타는

고행을 통해 나를 잊는 것이 

술을 취한자가, 도박을 하는 자가, 쾌락을 즐기는 자가 그 순간 순간 자신을, 현실을 잊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부처님을 알현하고 그의 가르침을 받고 의문을 제시했다. 

부처님이 깨달은 것을 그 시점 그 곳에서 자신의 상황에서 느끼지 않고 말로서는 그 깨달음을 가질수는 없다고. 

그리고 싯다르타는 모든 사람들을 스승으로 삼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카말라에게서 사랑하는 법을, 장사하는 법을, 도박하는 법을, 하인을 부리는 법까지 

모든 것을 배우며 자신이 그동안 수행한 것들을 잃어갔다. 

그리고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자신이 더이상 이곳에 머물러선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이 무시해왔던 사람들과 동일하게 되어 버린 후 그 모습을 보고 난 후 그는 다시 자신을 그 도시로 나가게 배를 태워준 뱃사공, 바주데바가 있는 나루터로 돌아갔다. 

그 곳에서 강이 들려주고 보여주는 소리와 모습에서 깨우쳐갔다. 

현실을 살아가며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며, 이야기하며, 하나씩 알아차렸다. 

하지만 또 카밀라와의 사이의 아들을 만나면서 

자신이 늘 어린아이같다고 한 사람들과 같아지는 자신을 다시 한번 목도한다. 

그리고 아들에 대한 걱정과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구도자의 삶으로 떠나는 날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많은 시간, 많은 일들로 계속해서 느끼고 또 고통스러워하고, 또 깨달아갔다. 

그 시간의 끝에 싯다르타는 시간의 왕도로서의 완성이라는 인간사에서의 가치를 놓게 되었다. 


말하는 것의 한계와 마찬가지로 삶의 모습 역시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았을 때 늘 노력과 과정으로서의 결과가 있고 

어림과 젊음을 거쳐 늙음이 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삶의 각가가 그 순간 모든 것이 내재되어 있는 완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문제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되었다. 


내가 나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것.

나의 행위나, 나의 계획에 나의 믿음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그리고 나의 행동이 

사람을 대할때 그 사람의 상황에 맞게 변하는 나의 행위가 그 사람을 맞춰주는 배려가 아니라

나의 일관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무언가의 완성을 위해 나는 나를 늘 숙였다는 것 또한 알았다.

그것이 더욱 빠르고 쉬운 방법임을 나는 누구보다 먼저 알아차리고 그저 취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싯다르타가 부처를 알현하고 난 뒤의 결심.

" 앞으로는 다른 어느 누구앞에서도 나의 시선을 떨구지 않아야지. 다른 어느 누구 앞에서도 말이야." 

"외국에서 온 부유한 무역상이라 할지라도 그는 자기 수염을 깍아주는 하인에게 대하는 것과 다바 없이 대하였다"라는 

싯다르타의 행동거지를 배웠다.

부처의 가르침에도 자신의 깨달음을 중시하는 모습에서 

자신의 생각과 깨달음을 "믿는" 싯다르타의 자존감이 보였으며, 

"그의 목적이 그를 끌어 잡아당기지요. 왜냐하면 의 목적에 위배되는 것으 그 어느것도 자기 영혼속에 들여보내지 않기 때문이요"

에서 자신의 목표에 대한 집중력을 사랑했으며 

"당신의 내면에는 당신이 매순간마다 그 속에 파고들어가 편안하게 안주할 수 있는 그런 고요한 은신처가 하나 있어"

라는 은신처를 나 스스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다른 누군가도 아니 나의 생각과 나의 행위를 믿는 자만이 

만인의 삶의 목적과 방향이 다른 이 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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